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룬 알 라시드 (문단 편집) === 칼리파 즉위 이전의 생애 === 766년 2월 16일 아바스 왕조의 이란 총독부가 자리잡은 레이(오늘날 이란 테헤란주 샤흐레레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아바스 왕조 3대 칼리파 [[무함마드 알 마흐디]]이고, 어머니는 비스하 인근에서 베두인 족에 잡혀 메카 인근 노예 시장에 팔렸다가 알 마흐디에게 구매된 알 카이주룬이다. 알 카이주룬은 775년 알 마흐디가 칼리파가 된 후 정식으로 아내가 되었다. 그는 [[야히야 이븐 칼리드]]를 포함한 우수한 가정교사들로부터 [[쿠란]]과 [[하디스]] 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수사학, 음학, 시 등을 공부했다. 또한 검술, 궁술, 전쟁 기술 등 무인으로서 갖춰야 할 능력도 숙달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야히야의 아들 파드힐, 자파르, 무사 및 무함마드와 친구로 지냈다. 780~782년 아버지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원정대 10만 명을 지휘했다. 아나톨리아를 관통하여 보스포러스 해협까지 진군했지만, 동로마 제국군의 거센 저항으로 인해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상실했고 보급이 끊기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의 동로마 장군 타차테스가 항복한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당시 어린 [[콘스탄티노스 6세]]를 대신하여 제국을 통치하던 [[이리니]] 황태후와 협상해 향후 3년간 매년 7만 디나르를 바치고 칼리파에 경의를 표하는 협약을 맺었다. 알 타바리에 따르면, 그는 전리품을 옮기기 위해 2만 마리의 노새를 고용했고, 바그다드에 돌아왔을 때 검의 가격은 1디르함, 말의 가격은 동로마 1 디나르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는 이 공적으로 이집트, 시리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등 아바스 제국의 서쪽 영토를 통치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알 마흐디는 당초 장남 [[알 하디]]를 후계자로 정했지만, 아내 알 카이주란과 재상 야히야 이븐 칼리드가 차남인 그를 후계자로 세우라고 강력히 권하자 마음을 바꿨다. 이후 알 하디가 동생을 위해 후계자 지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알 하디가 반란군 토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요르단으로 갔으나 785년 7월 24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슬람 문헌에는 그의 첩 하시나가 또다른 애첩을 질투해 그녀를 독살하려고 독을 넣은 배가 담긴 접시를 가로채서 배를 먹었다가 독살당했다는 설, 사냥 사고로 사망했다는 설이 제시되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의 죽음이 심상치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알 하디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곧바로 바그다드로 향하여 20일 만에 도착하여 칼리파로 선임되었다. 그는 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알 하디는 그를 배제하고 자신의 아들 자파르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하룬과 하룬의 측근을 따르지 않던 군부의 여러 장성이 그의 계획에 찬성했다. 그러나 카라주룬과 야히야 이븐 칼리드는 지지자들과 함께 이에 결사 반대했다. 그는 "일개 신하가 칼리파 승계에 간섭한다"라며 야히야 를 투옥했지만, 카이주룬의 강한 권고가 있던 데다 하룬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에게 했던 충성 맹세를 저버릴까 두려워서 하룬을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 후 어머니 카이주란을 정치에서 배제하고 제국을 통치하던 알 하디는 786년 9월 14일 1년 3개월만에 돌연 사망했다. 알 타바리는 위궤양으로 사망했다는 설과 부친의 첩이 독살했다는 이야기를 저서에 실었다. 카이주룬이 자신을 정치에서 배제해 버린 아들에 분노해 노예 중 하나에게 밤에 그의 침실로 잠입해 베개로 목을 졸라 죽이게 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후 하룬이 신하들의 추대로 칼리파에 등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